시력(Vision)의 새로운 비전

윤민화

2022년 1월 19일

추미림이 그동안 일관적으로 보여준 패턴화된 모듈1의 형식은 도시를 기계적 관점으로 조망함으로써 갖게된 ‘새로운 시력’2에 의해 생성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글은 추미림의 최근 작업의 양상을 두 가지 논점으로 분석해본다. 하나는 추미림이 도시를 일종의 인공물로 간주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도시를 인공위성과 같은 기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각성의 문제다. 도시 개발과 인공위성은 상이한 두 개의 기술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나는 추미림이 이 두 개를 하나의 화면에 특정한 방식으로 구현하는데에는 작가가 의도한 알레고리가 있으며, 이것은 기술 도구에 의한 새로운 시력과도 연관이 있다고 본다.

시력(Vision)의 새로운 비전


윤민화(독립 큐레이터/ 포스트휴먼 연구)


추미림이 그동안 일관적으로 보여준 패턴화된 모듈1의 형식은 도시를 기계적 관점으로 조망함으로써 갖게된 ‘새로운 시력’2에 의해 생성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글은 추미림의 최근 작업의 양상을 두 가지 논점으로 분석해본다. 하나는 추미림이 도시를 일종의 인공물로 간주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도시를 인공위성과 같은 기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각성의 문제다. 도시 개발과 인공위성은 상이한 두 개의 기술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나는 추미림이 이 두 개를 하나의 화면에 특정한 방식으로 구현하는데에는 작가가 의도한 알레고리가 있으며, 이것은 기술 도구에 의한 새로운 시력과도 연관이 있다고 본다.


인공물로서 신도시에 대한 조형적 분석


추미림은 2014년에 있었던 두번째 개인전 《POI : Point of interest》부터 자신이 살았던 세계 여러 도시들을 작업적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다가, 2020년 갤러리룩스에서 열린 개인전 《Satellites: 위성들》에서는 특정 신도시에 집중하고 있다. 추미림이 신도시를 주로 작업적 대상으로 삼은 것은 비단 작가가 오랜 기간 거주했던 경험에서 온 것만은 아니다. 추미림은 언제나 인공물에 관심이 있었고, 특히 사전에 정교하게 설계되어 그 정체성에까지 영향을 주는 디자인 작업에 분석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3 여기서 말하는 디자인은 말 그대로 특정한 목적을 갖고 조형을 실체화하는 일을 말한다. 신도시는 인위적으로 디자인되고, 조성되어, 정체성이 부여된 하나의 인공물이다. 신도시를 흔히 ‘계획 도시’라고 부르듯이, 상당히 복합적이면서 동시에 날카롭게 부여된 ‘의도’들이 그 개발과 조성에 깊숙히 관여하기 마련이다.

추미림의 작업에서 신도시의 전경이 부감의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은 인공적으로 도시를 조성할 때 고려한 물리적 경관에서부터 작가가 거주자로서 경험해 온 주관적 동선까지의 여러 층위를 아우르며 그 관계망을 탐사하도록 의도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도시를 조성할 때 정부에 의해 사전에 기입된 ‘의도’는 분명히 있겠지만, 실상 거주민들은 그 경로를 꼭 그대로 밟으며 살게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시민들은 ‘의도적 도시화’와는 반드시 부합하지 않는 일상을 살면서 형성해 나가는 도시성을 드러내게 될 터, 추미림의 화면 안에는 그러한 정부 주도적 신도시의 의도적 질서와 거주민으로서 신도시의 경관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일부 구성하며 만들어간 배치가 혼재해 있다. 이것은 도시의 경관이나 각각의 인공물들의 부분들이 주관적으로 재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미림의 작업에서 기하학적으로 질서 정연하게 배치된 모듈의 형식들은 추미림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되고 과장되어 축소 배열된 모양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한 일련의 질서와 배치는 신도시를 설계하고 조성할 때 이미 들어서 있었던 특정한 의도에서 기인한 것일테다. 특히《Satellites: 위성들》에 출품한 여러 작품들에는 반듯하게 잘 배치된 질서정연한 건축물들이 모듈의 조합으로 환원되어 구현되어 있다. 기하학적 구성으로 형식미를 보여주고 있는 이같은 작품들은 전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님에도 어떤 면에서는 사실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실제 신도시가 의도적으로 기하학적으로 질서 정연하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반듯하게 구현한 계획 도시의 경관에 깔린 특정한 의도를 다시 한번 추상화된 형식미로 환원함으로써 언뜻 중립적이고 아무런 정치적 의도가 없어 보이는 간단하게 모듈화된 도시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주관적 경험에서 기인한 감각으로 그것들을 재구성함으로써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경험의 복합적 층위를 형상화한 것이다. 나아가 추미림이 패턴화된 모듈을 평면에 재배치할 때, 거기에는 인위적인 질서에 대한 추미림만의 해석이 알레고리처럼 작동하게 되는데, 그러한 해석 능력은 인공위성이라는 시각화 도구가 생성하는 새로운 시력에 기반하여 작동된다.


기술적 시각의 새로운 시력


추미림은 인공위성 사진을 작품에 직접 대입하기 보다는, 기계적 시선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한다고 볼 수 있다. 비인간적인 인공위성의 시각성을 경유함으로써 새롭게 볼 수 있게 된 것들을 기하학적으로 단순하게 모듈화한 뒤, 다시 추미림의 주관적 해석이 개입된 조형으로 도시성을 구현한다. 따라서 인공위성의 관점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시각적 인지 방식과 인간의 시선을 초월하는 인공물의 감각은 작업의 주요한 심미적 차원으로 활용된다.

지상으로부터 600킬로미터라는 거리는 인간이 규범화한 정상적인 지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따라서 원근감은 사실상 사라지고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평면화’해 버린다. 일견 감성화의 거부로 읽히기도 하는 이러한 거리감은 또한 모든 이미지를 데이터로 치환해버린다는 점에서 코드나 수사로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눈을 가장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기술은 결코 객관적이거나 순수하지 않다. 전쟁기계로 고안된 인공위성의 시선은 모든 것을 평평하게 볼지는 몰라도, 결코 그 기술에 내재된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인 명령의 사슬까지 평면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술 내적인 시스템은 결코 기술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반듯하고 질서 정연하게 배치된 신도시는 그 설계 과정에서부터 정치적 의도와 목적이 점철되어 있듯이, 인공위성 또한 모든 것을 일관되게 지켜보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의 작동하는 내면에는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관료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추미림은 중립적인 시선을 채택하기 위해 신도시나 인공위성의 시각을 작업의 중요한 매개물로서 선정한 것이 아니다. 복합적으로 구성된 인공물을 경유하며 작가는 새로운 시력을 확보하고 그럼으로써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자 한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오늘날 발달한 기술과학적 시각 도구들과 그것들에 의해 생산되는 기술과학적 이미지 리터러시에 대해 말한 바 있다. 해러웨이는 컴퓨터, 비디오 카메라와 같은 디지털 매체뿐 아니라 인공위성, 초음파 기계, 광섬유 기술, 마이크로 영화 촬영술과 같이 발달한 시각화 기술이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가시화시키고 있음을 상기시킨다.4 규범에 안정적으로 안착한 시력은 잘 보는 법에 고도로 적응한 사람들을 양산하고, 원근법과 같은 이미지 리터러시는 그러한 보는 법에 따라 생산해내는 이미지로 가득찬 규범적 세계관만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 정교한 이미지 리터러시에 의해 우리가 보지도 못하며, 그래서 파악하지도 못하는 것들을 위해서는 새로운 시력이 요구된다. 해러웨이는 오늘날 만개한 이미지 표현들은 지난날 지식을 생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시각을 훈련하는 방법, 다시 말하면 이미지 리터러시에 의해 정교화되어 왔고, 그러한 이미지 리터러시의 역사는 가시성 또한 “누군가에 의해 누구에 대해서”만 설파되어 왔으며, 그 결과로 “실종된 응시"를 낳았다고 말한다.5

기술과학적 시각화 장치들은 지난날에는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서 볼 수 없었던 시각장의 이미지들을 우리 인간 시력의 가시권 안으로 가져와 보여주기 시작했다. 평범한 인간의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었던 것들이 시각화 기술에 힘입어 우리 눈앞에 보이는 상황은 추미림의 작업이 놓인 환경이자 조건이다. 해러웨이를 경유하여 추미림의 작품을 보면, 인공적 도시를 보는 인공위성의 기계적 시력(vision)은 지난날 천착해 온 보는 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vision)의 구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작가가 작가만의 대물렌즈를 장착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렌즈를 투과하여 새로운 시력으로서 신도시의 조형적 질서를 탐색해 왔다는 것, 결국 시각 장비의 매개로 인해 새로운 시력을 갖는 일에 비전을 갖고,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도시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새로운 보는 법과 그로부터 새로운 형식으로 본 것을 배치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시력의 새로운 비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선보였던 두번째 개인전에서 추미림은 자신이 살았던 도시의 경관을 구글 어스 프로그램으로 다시 보고, 작가의 경험을 덧붙여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지도 만들기에 열중했다. 이때, 지도는 모듈화된 도형들의 패턴으로 추상화된 이미지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구조물 위에 종이를 여러 겹 쌓아 올리며 나름의 입체감을 부여했다. 이렇게 물성과 부피감이 부여되면서 지도는 더욱더 상대적으로 주관적으로 재구성되고, 마치 기계를 뜯으면 발견하게 되는 부품들의 병렬식 회로처럼 도시라는 인공물의 시스템과 그 의도적 배치 이면의 파이프 라인이 추미림의 방식으로 재현된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후 세번째 개인전 《일렁이는 그리드에서 태어난 새로운 형태의 모듈》에서 추미림의 지도 그리기는 제작 방법에 있어서 커다란 갱신을 한다. 그러한 방법적 도약은 스텐실 기법을 활용하면서 드러나는데, 작가는 컴퓨터에서 작업한 도안을 종이에 출력한 뒤, 모듈의 각 부분들을 모두 칼로 오려내어 일종의 템플릿을 제작한 것이다. 이 템플릿을 다시 다른 종이 위에 얹고 스텐실 기법으로 붓과 스펀지를 이용해 찍어내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생산하게 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그렇게 찍어낸 이미지뿐 아니라, 사용된 템플릿까지도 작품으로 간주되어 전시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추미림이 기계적 시각성이 준 새로운 시력으로 비로소 무엇을 볼 수 있게 되었는지를 정확히 알고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의 문법과 질서를 기계적 관점으로 구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던 지난 전시에서와 달리, 세번째 개인전부터 추미림은 갱신된 시력으로 말미암아, 도시의 구조물이 아닌 그 나머지 공간을 물감이 마구 묻혀진 템플릿을 전시하는 것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회적, 기술적 질서 내부에 거주할 때는 볼 수 없었던 시각성이다. 새로운 시력이 스텐실 기법을 만나 그동안 볼 수 없어 보이지 않았던 풍경을 생성해낸다.6

추미림의 가장 최근 개인전 《Satellites: 위성들》에서 추미림이 창안하는 모듈들은 구조적으로 정교하게 연결되면서 패턴의 흥미로운 리듬감이 생기있게 다가온다는 측면에서 한층 숙련된 조형력을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띠는 작품은 <Inter Change>이다. 분당-서울을 잇는 복잡하지만 나름 질서를 갖고 있는 인터체인지의 유동성을 단순한 선의 리듬만으로 시각적으로 구현하면서 방향성, 운동성, 에너지와 같은 생동감과 동시에 그러한 인공물에 내재하는 기술적 질서가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를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이제는 마치 추미림 자신이 기계-인간적 시력을 구사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이 개인전에서 추미림은 중요한 새로운 실험을 선보이는데, 그것은 <Castle> 시리즈와 와 영상 작품 <Windows>를 통해 ‘서사'의 전면적이고 본격적인 구현을 시도하는 점에 있다. 그동안 추미림은 인공위성의 기계적 관점을 경유해 내려다 본 도시의 표면을 패턴화된 모듈로서 조형적으로 배치하는 것에 집중했지만, 이 작품들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모듈 내부에 서사를 기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공적 구조물을 조형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모듈이 사용되었던 방식에서 벗어나, 모듈은 이제 창(window)이 되어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틈이자 동시에 공간이 되었다. 인간-기계의 관점에서 도시를 본다면, 창 너머로 보이는 그 세계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해러웨이 식으로 말하자면, 단언컨대,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그래서 결코 기존의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실종된 응시로 인해 시야에서 감춰졌던, 시력의 새로운 비전으로 인해서만 새로운 관계를 이끄는 인공물이, 이 창 너머 세계에서 비로소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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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동안 추미림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특정한 형식에 대해 비평가들은 주로 “픽셀"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해 왔다. 하지만 나는 고의적으로 픽셀이라는 표현을 피함으로써, 해당 개념으로 인해 갖게 되는 표현 형식의 한계를 거부하고자 한다. 추미림이 도시의 이미지를 추상화하고 패턴화할 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기본 도형 단위들을 픽셀이라고 설명하게 되면 해당 어휘가 주는 시각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한정된 해석으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나는 ‘패턴화된 모듈'이라는 개념으로 추미림의 작업을 설명하고자 한다


2 도나 해러웨이로부터 추출된 ‘Vision’이라는 개념은 사전적으로 ‘시력, 시야’의 뜻을 갖지만, 동시에 비전이라는 어휘의 통상적인 사용면에서 ‘전망'이라는 긍정적인 미래에 대한 예상의 뜻도 갖는다. 이러한 두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시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추미림의 예술 형식을 논하고자 한다.


3 추미림은 초기 휴대폰의 기술 개발 과정에서 UI 디자이너로 일했던 경력을 갖고 있다.


4 도나 해러웨이, 민경숙 옮김, 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인간©_앙코마우스TM를_만나다, 도서출판 갈무리, 2006, 338~339쪽.


5 해러웨이 앞의 책, 389쪽.


6 이러한 맥락에서 추미림이 작업 외적으로 제작한 ‘모양자'(정식명칭: icon template)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모양자는 추미림이 창안한 모듈의 패턴을 재생산할 수 있는 장치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서 공간성을 갖는 조형물이 된다.